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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PC통신 나우누리에서 '견우 74'라는 아이디로 시작된 웹소설이 불과 2년 만에 스크린을 뒤흔들었습니다. 



연출 의도: 코미디인 줄 알았는데 복선 덩어리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엽기적인 그녀』를 완전한 코미디 영화로 기억하는 분들이 많은데, 제가 DVD 코멘터리를 찬찬히 들여다보니 이 영화는 처음 설계부터 멜로드라마였습니다. 감독이 의도적으로 후반부 장면을 프롤로그로 끌어다 쓴 것, 그리고 초반의 고모 대사를 후반과 연결시키는 복선 구조, 이런 것들이 단순한 웃음을 노린 영화에서는 보이지 않는 설계입니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전철에서 그녀와 견우가 만나는 장면 옆에 앉은 노인을 그냥 '훈훈한 엑스트라'로 넘겼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온 늙은 견우라는 설정이라는 걸 알고 나서 다시 보니 소름이 돋더라고요. 감독은 이 시간여행자 설정을 영화 후반 대사에도 은근하게 깔아두었는데, "타임머신이 생길 것"이라는 그녀의 말이나 엔딩의 명대사 "우연이란 노력하는 사람에게 운명이 놓아주는 다리랍니다"를 노인과 젊은 견우가 똑같이 말하는 구조가 그 근거입니다.

여기서 복선(伏線, foreshadowing)이란 결말을 앞에서 미리 암시해 두는 연출 기법을 말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프롤로그 자체가 엔딩의 일부를 앞당겨 배치한 거대한 복선으로 기능했습니다. 극장 개봉판에서는 설명 없이 넘어가던 장면들이 DVD 확장판(Extended Cut)에서는 추가 시퀀스로 채워져 맥락이 훨씬 선명해집니다. 제 경험상 이런 구조는 두 번 볼 때 진짜 맛이 납니다.

촬영 기술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전철 내부 장면은 창밖에 크로마키(Chroma Key) 판을 설치하고 CG로 배경을 합성한 것입니다. 크로마키란 특정 색상(보통 초록 또는 파랑)을 투명하게 처리해 다른 영상을 합성하는 기법으로, 지금은 흔하지만 2001년 당시 국내 상업영화에서 이 정도로 활용한 것은 꽤 공을 들인 작업이었습니다. 스태프들이 손잡이를 직접 흔들고 스테디캠(Steadicam) 감독이 창밖 풍경 트래킹까지 맞추느라 시간이 엄청나게 걸렸다고 합니다. 스테디캠이란 촬영 기사가 몸에 장착해 카메라 흔들림을 최소화하는 장비로,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흔들림을 살리는 용도로 쓰였습니다.

제가 몰랐던 디테일들

극장판과 DVD판의 차이가 생각보다 상당합니다. 제가 확인한 DVD 전용 장면만 꼽아도 적지 않습니다.

  •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견우의 목걸이 클로즈업 컷 — 극장판 없음
  • 차태현 배우가 실제로 전라로 촬영한 장면 — 콘티에는 허리까지였으나 엉덩이까지 촬영
  • 두 사람이 다시 만나기 1시간 전 상황 — 극장판에서는 설명 없이 우연히 만남
  • 견우가 아침에 나오며 그녀를 기다리는 씬 — DVD에만 존재
  • 여관 사장님이 옆방을 엿듣는 씬 — 극장판 삭제

베라 아이스크림 대사는 PPL(간접광고) 협찬을 현장에서 받으면서 즉석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PPL이란 영화나 드라마 안에 제품을 자연스럽게 녹여 노출하는 광고 방식으로, 당시로서는 꽤 적극적인 활용이었습니다. "체리쥬빌레즈 탄금호까지 슈팅스타 먹을까?" 같은 대사가 현장에서 태어난 거라니,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요약: 코미디처럼 보이는 『엽기적인 그녀』는 시간여행자 설정·프롤로그 복선·크로마키 합성까지 촘촘하게 설계된 멜로드라마였습니다.

 

비하인드와 타임캡슐: 배우와 현장이 만든 장면들

일반적으로 영화의 명장면은 감독이 다 설계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제 경험상 이 영화는 배우의 즉흥 연기, 즉 애드리브(Ad-lib)가 완성도를 상당 부분 끌어올렸습니다. 애드리브란 대본에 없는 대사나 행동을 배우가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전지현 배우가 가발을 털어서 다시 씌우는 장면은 감독을 포함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즉흥 연기였고, 현장이 통째로 빵 터져서 그대로 OK 컷이 됐다고 합니다. 반면 교복 댄스 장면은 처음엔 OK가 났는데 카메라가 돌지 않았던 탓에 두 배우가 거품을 물 때까지 세 번이나 다시 찍었습니다.

차태현 배우의 애드리브는 기억이 다하지 않을 만큼 많았다고 감독이 밝혔습니다. 술집에서 "술 한잔하시고 바쁘세요?"라는 대사도 시나리오에 없던 즉흥이었고, 타임캡슐 묻는 씬의 마지막 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오봉산에서 뛰어가는 컷은 콘티에 없었는데 차태현 배우가 아이디어를 내서 현장에서 추가됐습니다. 제가 이 장면을 다시 보니 그 달음박질이 없었다면 견우라는 캐릭터의 절박함이 훨씬 덜했을 것 같습니다.

촬영지 섭외 과정도 흥미롭습니다. 강원도 정선의 타임캡슐 나무는 감독이 전국의 기차를 타고 다니다가 우연히 창밖으로 발견한 나무를 기억해두었다가 나중에 다시 찾아와 찍은 것입니다. 잔디는 전부 새로 심었고, 촬영 이후에도 그 잔디가 살아 있었다고 합니다. 2011년에는 정선군이 이 일대를 '정선 타임캡슐 공원'으로 조성하고, 나무 이름도 '엽기 소나무'로 붙였으며 실제 타임캡슐을 무료 보관해주는 서비스까지 운영하고 있습니다(출처: 정선군청).

부평역 촬영 때는 인파가 너무 몰려 연출부가 양옆을 통제하는 와중에, 실제로 취한 시민 한 분이 "꼭 지나가야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결국 그냥 모시고 지나가도록 했고, 감독은 이것이 본인이 이 영화를 찍으며 가장 잘한 연출이라고 꼽았습니다. 통제 불가능한 현실이 오히려 영화에 숨결을 불어넣은 셈입니다.

전지현 배우의 연기에 대해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오봉산에서 "견우야, 미안해"를 외치는 장면이 다른 씬들에 비해 약간 어색하게 들렸습니다. 당시 전지현 배우의 연기 경력을 감안하면 저 정도 감정 폭의 신은 꽤 어려운 도전이었을 것같습니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어린 시절 첫사랑의 서투름처럼 보여서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전지져 배우가 차태현 배우를 존중하거나 떠받드는 장면이나 대사는 영화 내내 찾기가 거의 어렵습니다. 힐을 바꿔 신기고 "나 잡아봐라, 안 잡으면 죽어"라고 외치는 그녀가 영화 제목 '엽기적인 그녀'를 그 자체로 증명합니다. 제 경험상 이 캐릭터의 매력은 그 예측 불가능성에 있고, 그게 지금 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KOFIC) 자료에 따르면 이 영화는 2001년 국내 관객 약 498만 명을 동원하며 그해 한국 영화 흥행 2위에 올랐고, 이후 아시아 전역에 한류 로맨틱 코미디 붐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출처: 한국영화진흥위원회). 그 당시 연애십계명과 OST가 유행했고, 신승훈이 부른 버전을 감독이 처음 들었을 때 비로소 "좋은 노래"라고 확신했다는 뒷이야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약: 명장면의 상당수는 배우의 애드리브와 통제 불가능한 현장이 만들어냈고, 정선의 타임캡슐 나무는 지금도 실제 공원으로 남아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엽기적인 그녀 DVD판이 극장판이랑 다른 점이 뭔가요?

A. 일반적으로 극장판과 비슷할 거라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실제로 꽤 다릅니다. 잠든 그녀를 보는 목걸이 컷, 두 사람이 다시 만나기 1시간 전 상황, 여관 사장님 씬, 아침에 견우가 기다리는 씬 등이 DVD에만 추가돼 있어서 인물 간 감정선이 훨씬 선명하게 보입니다.

 

Q. 영화에 나온 타임캡슐 나무 실제로 갈 수 있나요?

A. 네, 갈 수 있습니다. 강원도 정선군이 2011년에 해당 장소를 '정선 타임캡슐 공원'으로 조성했고, 나무 이름은 '엽기 소나무'입니다. 실제 타임캡슐을 보관해주는 서비스도 운영 중이라고 하니, 영화 팬이라면 한 번쯤 찾아가 볼 만한 장소입니다.

 

Q. 전철 촬영은 실제 전철 안에서 한 건가요?

A. 전철 내부 장면은 세트에서 찍고 창밖은 크로마키 합성으로 처리했습니다. 분당선 지하철 안에서 실제 촬영한 씬도 있는데, 그쪽은 소음이 너무 심해 동시 녹음에 고민이 많았지만 감정선을 살리기 위해 현장음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Q. 원작 웹소설이랑 영화 내용이 많이 다른가요?

A. 분위기는 비슷하지만 디테일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원작에는 '해수술'이라는 단어가 직접 등장하는데 영화에서는 삭제됐고, 동전으로 선을 긋는 장면도 원작 그대로 찍어봤더니 어색해서 립스틱으로 바꿨다고 합니다. 웹소설 특유의 맞춤법 파괴 문체가 당시 분위기를 그대로 담고 있어서, 원작을 먼저 읽은 분들은 영화가 좀 정제된 느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Q. 영화에 나오는 독수리 5형제 설정이 뭔가요?

A. 김일호 배우 한 명이 여관 주인, 자해공갈단 형님, 역장 등 여러 역할로 반복 등장하는데, 감독이 이를 '다섯 쌍둥이 독수리 5형제'라는 설정으로 만들었습니다. 각 캐릭터가 나오는 장소마다 같은 액자가 걸려 있는 등 연결 고리를 심어두었는데, 일반적으로 그냥 지나치기 쉬운 디테일이라 DVD 코멘터리를 보기 전에는 저도 전혀 몰랐습니다.

 

결론

20년이 넘은 영화를 DVD 코멘터리로 다시 뜯어보니, 제가 그냥 웃고 넘겼던 장면들이 사실은 촬영팀의 밤샘과 배우의 멍, 그리고 감독의 집요한 설계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그냥 추억으로만 간직하던 분들에게 DVD 확장판이나 코멘터리를 한 번쯤 찾아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극장판에서 설명 없이 넘어갔던 장면들이 맥락을 얻으면, 이 영화가 단순한 '엽기 코미디'가 아니라 상실을 품은 사람과 그 곁을 지킨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이 훨씬 선명하게 보입니다. 정선 타임캡슐 공원도 한번 직접 가보고 싶어졌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_ci0dRYn69I